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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소리] 장편소설-각시붕어-태몽(2)

jbsori 2021. 1. 4. 08:49

 

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태몽(2)

만들어진 떡은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과객까지,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그래야 “아기가 오랫동안 잘 살아 갈수 있다”고 했다.

솥 뒤나 부뚜막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만 단지에 쌀을 담은 조왕단지, 사발에 정화수를 담아서 모시고 있는 부엌을 다스리는 가신인 부엌의 조앙신께 무릎을 꿇고 먼저 백설기 떡을 올렸다.

그 다음에 두 손을 모아서 태어난 아이의 무병장수와 행복을 정성껏 빌었다. 축원이 끝나자 행낭 어멈을 시켜, 마을 집집마다 가져다주게 했다.

 

감병만은 덕촌부락에서 꽤 부자였다. 농사일이나 집안일이 바쁠 때는, 수시로 장정들을 불러다 일을 시켰다. 품삯을 넉넉히 쳐주었기 때문에 꽤 인심을 얻고 있었다. 마을사람들과의 교분이 빈번했다.

백설기 떡을 얻어먹은 마을의 장정들은 당산나무인 팽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풍악대를 만들어 김병만의 집을 돌면서 꽹과리, 북, 징, 장고 등의 악기로 풍악을 울렸다. 태어난 아이의 무병장수와 복을 빌었다.

김병만은 농사철에 많은 농부들의 협조를 받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약간의 돈과 쌀을 가지고 나와, 감사를 표하고 간단한 음식, 막걸리와 안주를 내왔다. 구경하러 다니는 마을사람들과 수고하는 장정을 위무해 주었다.

덕촌부락 입구에는 오백년이 훌쩍 넘은 팽나무가 태산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마을에 들어오는 전염병 등 액운을 막아주고 있다고 했다. 아들을 낳고 싶다 던지,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부자로 잘살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많았다.

아이의 생일날이나 정월대보름, 사월초파일, 오월단오, 팔월추석, 십이월 동짓날 등 신의 기운이 강해지는 날, 팽나무 밑에 간단한 떡이나 음식을 차려놓고 팽나무신에게 축원을 드렸다.

 

우물에서 끊임없이 몸에 좋은 보약 성분 들어 있는 맑은 물이...

그 시절은 유치원이나 학교를 지을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모여 놀 놀이터나 함께 탈 수 있는 기구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네 아이들은 5백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커다란 팽나무를 “할머니 팽나무”라고 불렀다. 시간이 날 때마다 팽나무 밑에 모여들어 놀았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숨바꼭질, 구슬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딱지치기, 사방치기라고도 불리는 돌차기, 가위 바위 보를 하거나, 아까시나무잎 따기, 팽이치기, 고무줄놀이, 닭싸움, 기마전, 씨름, 줄다리기, 자치기, 제기차기 등을 하면서 놀았다. 해지는 줄 모르다가, 어머니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아기가 태어난지 이레가 되었다. 부락입구에 있는 동네사람들 모두가 쓰는 커다란 공동우물 이 말라 버렸다. 이 마을을 방문한 유명한 풍수나 한약방 의원들은 “덕촌부락 노인들이 타 지역에 비해서 오랫동안 무병장수하는 것은, 우물에서 끊임없이 몸에 좋은 보약 성분이 들어 있는 맑은 물이 솟아나오기 때문이다”고 칭찬 했다.

그들의 말대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른 적이 없었던 우물이 말라버리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덕촌부락 사람들은 어쩔 줄 모르고, 마을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점을 쳐 보았다. 무당이 한참동안 쇠방울을 흔들어대며 점괘를 뽑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을 주워들은 대로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우물을 지키며 살고 있던, 각시붕어신이 딴 데로 가버려서 우물이 말라버렸다” 우물에서 다시 물이 나오게 하려면 “저수지에서 각시붕어를 잡아다 넣어야 한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마을 장정들이 그물을 가지고 저수지로 달려갔다. 커다란 각시붕어를 몇 마리 잡아다 우물에 놓아주었다. 물이 차가워서 각시붕어는 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각시붕어를 잡아다 넣어주었으나, 여전히 우물물은 나오지 않았다. 

"조상들이 살아온 덕촌부락, '아름다운 지상낙원'이라 생각" 

몇 날이 흐르면서 동네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서로를 의심하며, 벌교, 순천, 예당 등지에서 유명하다는 무당들을 찾아가 점을 보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다. 우물물은 나오지 않았다. 동네의 분위기가 살벌해져가기 시작했다.

100여 가구가 모여 수백 년을 살아온 덕촌부락의 대부분은, 김해김씨가 차지하고 있었다. 김만복은 조성면장이었다. 김해김씨 종손으로 존경을 받아오며, 부락민들의 애경조사에 제일먼저 찾아갔다. 예를 다하고 많은 도움을 주어왔다.

매일매일 자전거를 타고 면사무소에 출근했다.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이 소곤대는 흉흉한 괴 소문을 들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았다. 평소에 면장과 친했던 용택이 엄마가 “마을에 우물이 말라버린 것은, 누군가가 우물을 지키는 각시붕어 신을 잡아가버렸기 때문이다”고 했다.

무당이 한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면장은 그날 오후, 부락사람들 모두를 팽나무 밑 공터로 모이게 했다.

부락사람들에게 무당이 이야기한 “각시붕어신이 우물을 마르게 하였다”는 말은 황당하게 지어낸 미신이다.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예전처럼 주민 모두가 서로 믿고 아끼면서 오순도순 살아가야한다. 온정이 넘치는 부락을 만들자고 설득 했다.

 

그러면서 준비해온 떡과 음식, 막걸리 등을 펼쳐놓고 한분한분 극진히 대접했다. 면장인 자신이 얼마나 덕촌부락을 사랑하며 아끼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조성면장인 김만복은 김해김씨의 자자일촌 이다시피 한 덕촌부락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다. 3대독자 외아들 종손이었다.

조상들이 살아온 덕촌부락을 아름다운 지상낙원이라 생각했다. 수많은 과일나무, 향나무, 동백나무, 목단 등 좋은 나무와 작약, 국화, 등 꽃을 심었다.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었다.

특히 김만복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배워온 “뽕나무 길러가지고 누에를 치면 명주베를 생산해, 농가소득이 높아져 부자마을이 되어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양잠사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뽕나무를 키워 누에키우는 방법, 명주베 짜는 방법 등을 가르쳐 5년 후부터는 많은 명주실과 명주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시대는 일제 강점기로, 세계전역에서 전쟁을 치르느라고 자원이 많이 부족했다.그럼에도, 전남도청에서 덕촌마을을 모범부락으로 선정하고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농촌인 덕촌부락에 다른 지역의 인부를 동원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여러 날 동안 공사를 해주었다. 도로를 넓히고 전기를 사용해 불을 켤 수 있도록 해주었다.

 

김만복, 귀국하여 우선 고향인 덕촌부락을 잘살게 해보려고 노력

읍내에도 전기로 불을 켜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더더군다나 산간벽촌에서 전깃불을 구경 할 수 있는 곳은 전국에 몇 곳이 되지 않았다. 김만복 면장이 노력한 결과,농가 소득이 증대되고, 전깃불을 구경 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운동이 점점 치열해 짐에 따라, 일본 순사들은 순찰을 강화하였다. 하루에도 한 두 번씩 마을 곳곳을 다니며 조사를 했다. 각 부락민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타를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심지어는 경찰서나 주재소로 잡아갔다. 고문을 하고 감방에 가두어 두기가 일쑤였다.

 

덕촌부락에도 순사가 긴 칼을 옆에 차고, 말을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와서 행패를 부리는 등 부락민들을 괴롭혔다. 김만복이 부락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사들 때문에 양잠사업에 지장이 많다”고 전남도 경찰청에 통보했다. “덕촌부락에는 순찰을 나오지않도록 해달라”는 건의문을 보냈다. 전남지역에서 유일하게 순사들이 나오지 않은 평화로운 부락이 되었다.

 

순사들의 행패가 없어짐에 따라, 부락민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였다. 소득이 더욱 높아졌다. 소득이 높아지고 화목한 부락이 되어 살기 좋은 부락이 되었다. 덕촌부락 사람들은 부락을 위해 애써주는 면장에게 항상 고마워했다. 면장이 말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무조건 믿고 따를 정도로 깊이 신뢰했다.

김만복은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있는 대학교로 유학을 갔었다. 유학을 하면서 유학 온 학생들로부터 일본강점기에 암울한 민족 현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토론회에도 참석 했다. 토론회에 참석하면 참석할수록, 우리나라 농민들이 처한 여건을 암담하게 느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심훈이 지은 상록수를 읽었다. 우리농촌이 일제의 극심한 식민지 수탈로 인하여 극도로 살기가 어려워 졌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가 국내에서 크게 대두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귀국하여 우선 고향인 덕촌부락을 잘살게 해보려고 노력했다. 공무원의 여러 보직을 거치고 조성면장으로 부임하여, 부락민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다. 차량도 별로 없고 휘발유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면장들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은 물론이고, 공무를 보기위한 출장 등 모든 공무에 자전거를 이용 했다.

 

김만복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기 전에 집 앞의 언덕에 올랐다.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둘러보면서, 이곳에 사는 분들을 행복하게 잘살게 해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덕촌부락은 뒤로는 소나무가 많이 살고 있는 봉두산이 높이 솟아,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산 밑에는 널따란 밭이 펼쳐져 있어, 농부들은 봄, 가을에는 무, 배추, 고추 등 각종 채소를 철따라 심거나 목화, 삼, 보리, 밀, 등 농작물을 심었다.

이러한 밭작물이 자라면서 마을이 꽃으로 덮여, 꽃 동내처럼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그때는 7월말에 접어들어, 아욱과에 속하는 목화가 백색, 황색, 옅은 붉은색 등 어여쁜 꽃을 피워내었다. 넓은 밭을 메우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문익점은 겨울에도 베옷을 입으며, 추위에 떨면서 지내는 불쌍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싶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통 속에 목화씨앗을 숨겨와 재배하기 시작했다.

 

목화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농작물 중의 하나로 재배되었다. 비교적 값싼 면제품을 만드는데 적합했다. 또한 생산량이 매우 많은, 경제적인 작물이라 재배 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우리나라도 전국적으로 많은 농가에서 재배, 솜 등을 넣은 옷을 만들어 입었다. 배고프고 추위에 떨며 지내야 했던, 지긋지긋 했던 추위를 피해 살아갈 수 있었다. 

/이용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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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2)만들어진 떡은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과객까지,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그래야 “아기가 오랫동안 잘 살아 갈수 있다”고 했다.솥 뒤나 부뚜막 한 구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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