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소리]재소자들 '엄마', "삼례나라슈퍼사건 왜곡 가슴 아파”
[특별 인터뷰] 재소자들을 품은 '엄마 천사', 유양자 씨

교도소 재소자가 최근에 보내온 편지.
“엄마. 다른 사람들은 영치금을 보내지 않는데 엄마는 이렇게 오랫동안 영치금을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엄마. 꼭 모범수로 나가서 뵙겠습니다.”
마치 친 엄마처럼 감옥에 있는 무기수들과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은 올해 나이 78세의 유양자 할머니다.
유 씨와 함께 전주교도에서 천주교 교화위원들의 모임인 ‘정심회’ 회원으로 30년 넘게 재소자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쳐 온 박영희 젬마(71) 씨가 지난 5일 전주시 송천동 미디어카페에서 만났다.
둘은 모처럼 만나 재소자들을 위한 봉사활동 근황에서부터 최근 다시 논란이 된 완주군 삼례나라슈퍼사건 재심 과정의 비윤리적 변호와 허위 진술에 관한 진실 공방 등을 주제로 약 2시간 가량 자연스러운 대화 형식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젊은 시절부터 오랜 세월 동안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봉사활동을 해 온 유 씨는 지금도 무기·무연고 재소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필요한 물품과 영치금을 보내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수감을 마치고 사회로 나온 장기수들과 함께 집에서 생활하며 이들의 생활을 보살펴 왔다는 유 씨와 박 씨. 둘은 30대 초반부터 교화·봉사 활동을 시작해 나이가 70세를 훌쩍 넘은 지금도 공통 화제는 오로지 '자녀들' 소식이 가장 우선 순위다. 두 사람은 '재소자들'을 '자녀들'이라고 부른다.
만나자 마자 자녀들, 즉 교도소의 장기·무연고 재소자들에 관한 대화의 주제로 긴 시간을 할애했다. 예전처럼 음식을 만들어 교도소를 찾아가 청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은 못하지만 정성으로 편지를 꼬박 꼬박 써서 보내고 있다는 유 씨는 자식들에게 온 답장이라며 웃으며 꺼내 보였다.
‘무의탁 출소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며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조용한 선행을 이어온 유 씨는 전주시 팔복동에 있는 영업용 환경세제 전문기업인 '삼풍화학'을 20대 때 창업해 대표로 활동했으나 최근에는 몸이 불편해 회사를 친딸과 조카들에게 맡겼다.

유양자 씨.
그러나 유 씨에게는 하나 뿐인 친딸 외에도 100여 명이 넘는 자녀들이 있다고 한다. 모두가 그를 대할 때면 '어머니' 또는 '엄마'라고 부른다고 한다. 교화위원으로 교도소에서 인연을 맺은 자녀들은 출소 이후에도 함께 살며 사회적응을 하고 심지어 결혼까지 시켜주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재소자들의 엄마, 대모”로 불린 유 씨, 결혼 시켜준 자녀들만 50명 넘어
독특한 유 씨의 삶에 관해 먼저 들어 보았다. 전남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주에서 정착해 살면서 전주가 고향이 됐다는 유 씨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 때 위암 판정을 받은 후 위 절제수술을 거쳐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정상적인 건강은 되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경영 일선에 나서기보단 이제는 고문 역할을 하며 경영에 대한 조언만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줄곧 무의탁 출소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직접 돕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유 씨는 "40대 무렵 교통사고를 내고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회사 배달 직원의 면회를 가면서부터 계기가 됐다"며 "당시 교도소 교정위원으로부터 '장기수나 무연고 재소자들이 가족이 없는 경우가 많고 가난하여 출소 후에도 재범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본격적인 교화 봉사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때부터 유 씨는 재소자들의 ‘어머니’가 되기로 마음먹고 전주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참여해 단순 절도, 폭력, 살인까지 전과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출소자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 씨와 함께 천주교 교화위원들의 중심체였던 '정심회'에서 봉사활동을 해 온 박영희 젬마 씨는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거나 어릴 때 고아가 돼 부모를 찾을 수 없는 무호적자들을 위해 자신의 호적에 이름을 올려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배려했고, 또 당시 장관에게 '출소 경과 후 전과 삭제 문제'를 건의하여 결국 법 개정을 이끌어 내었던 산증인”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완주군 삼례나라슈퍼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주교도소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세 청년(최대열·강인구·임명선)의 무고함을 최초로 주장하며 널리 알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
‘삼례나라슈퍼 사건’ 최초로 진실 밝힌 주인공, 박영희 젬마 씨

유 씨와 박 영희 젬마 씨(오른 쪽)
박 씨는 “유 할머니는 회사를 경영했던 터라 재소자들 중 출소하는 이들을 직원으로 채용하여 일할 기회를 먼저 주었고 운전 면허증과 각종 자격증을 취득해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히 거듭날 수 있게 했다”면서 “결혼을 시켜준 자식들만 50여 명에 이르고 직접 아파트 등 집을 마련해 살 수 있도록 한 자녀 부부는 10쌍이 넘는다”고 덧붙여 말했다.
오갈 데 없는 출소자들, 공장에서 일하며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
그래서 유 씨는 지금도 재소자들의 엄마 또는 어머니, 대모(大母)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유 씨가 그렇게 지원을 하며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운영했던 삼풍화학이 큰 힘이 되었다.
근래 전주시 팔복동으로 공장을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주시 동산동에 있었던 회사는 4,958㎡(1,500평) 부지에 방 10개와 공장, 텃밭, 농장을 운용하며 오갈 데 없는 무연고 재소자들이 사회로 나오게 되면 그들의 쉼터이자 일자리였던 곳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곳을 '사랑의 집'이라고도 불렀다.
지금도 매달 일정 금액을 교도소에 보내 후원을 하고 있는 유 씨는 어릴 적 4남매의 막내로 자라면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못 먹고, 못 배우는 사람들을 보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
유 씨는 "아버지를 여의고 나자 오빠들 셋을 공부시키느라 자신이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며 "사탕팔이에서부터 쌀장사, 생선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라고 회고한다.
“어머니가 워낙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셨고 곱게 자라신 터라 아들 셋에 저까지 거두기가 쉽지 않았다”는 유 씨는 “오빠 셋은 공부를 시켰지만 나는 학교를 가지 않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어려운 유년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어머니께 모든 걸 배웠다”는 유 씨는 “엄마이자 스승이셨다”고 말한다.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묻자 유 씨는 “생선을 여수에서 사다가 한 통에 다 못 담고 여러 통에 나눠 담게 되는데, 기차 여러 칸에 골고루 실어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던 시절, 혹시나 잃어버릴 것만 같아 울음이 나곤했다”며 “익산이나 벌교에 도착해선 양동이에 손을 쭉 넣어서 차가우면 싱싱하다는 증거였는데, 다 못 팔면 싼 값에 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음식 봉사, 영치금 지원에 그치지 않고 출소하면 함께 식구처럼 살기도
어린 시절부터 힘들게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한 유 씨는 20대에 들어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남자들도 하기 힘든 골재사업을 하기도 했다. 유 씨는 “군산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 들어가는 골재도 제가 수주해서 진행했던 작품”이라며 “여러 가지 사업들을 통해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한다.
미군부대와 상대하는 사업을 하면서 마찰과 갈등도 많이 겪었다는 유 씨는 당차게 사업을 하여 번 돈으로 전국 최초 영업용 세재를 생산하는 삼풍화학을 창업한 것이다.
겨우 20대 중반이었던 당시 창업하게 된 배경에 대해 유 씨는 “1968년 당시엔 세재를 생산하는 기업은 럭키와 애경뿐이었다”고 말한 뒤 “영업용 세재는 없었고 삼풍화학이 전국 최초로 만들어 납품하기 시작했다”면서 “지금은 일반화 되었지만 전국 각지에 납품처가 있고 인근 지역들에 널리 판매됐다”고 자랑했다.
그렇게 만든 회사를 재소자들을 위한 '사랑의 집'으로 운영하며, 그동안 어렵게 모은 돈을 재소자들을 위해 음식을 사서 봉사하고 영치금을 넣어주며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출소하면 함께 식구처럼 대하며 살았다.

지난해 연말에 재소자에게서 온 편지.
그러나 이제는 몸이 불편하고 위암 수술까지 받게 되자 사업장을 축소해 딸과 조카들에게 맡겼지만 정심회 활동과 재소자들 중 무연고 또는 무기수 재소자들을 위한 봉사활동과 지원은 계속 하고 있다.
“최근 청송 교도소에 자녀들 면회를 다녀왔다”는 유 씨는 “수많은 자녀들이 항상 찾아오고 안부를 물어와 활력소가 되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다.
“친딸이 특수학교에서 사위와 함께 부부 교사로 재직하며 평생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한다”는 유 씨는 자신이 일군 사업장을 그런 딸에게 맡겨서 더욱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전국 재소자의 어머니'...2007년 ‘올해의 전북인’ 선정도기도
유 씨는 2007년 전북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전북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회복귀지원센터 이사장 시절이었던 유 씨는 그 때 나이 65세. 그는 당시 재소자 80여명의 어머니로 통했다.
전북일보는 유 씨에 대해 “청소용 세제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며 20여년 째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를 돌보고 있다”며 “재소자는 TV를 통해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여성에서 재소자의 어머니로 통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을 겪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는 인터뷰를 큼지막하게 실어주었다.

전북일보 2007넌 12월 28일 기사(홈페이지 캡쳐)
2007년 12월 28일 전북일보가 유 씨와 인터뷰한 내용, 그 당시 한겨레신문 등에 보도된 기사들을 보면 많은 궁금증이 풀린다. 다음은 15년 전 당시 유 씨가 신문과 인터뷰 한 내용(전문)이다.
- 대부분 이들이 꺼려하는 교도소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과 정성, 재산을 들이며 재소자를 돌보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습니까?
20년 전 회사 차량기사가 잇따른 교통사망사고를 내고 구속됐었습니다. 그 기사를 특별면회하려 교도소를 찾았다가 우연히 한 무기수를 알게 됐고 무기수와 장기수들에게 종교서적을 넣어주면서 이 길에 이르게 됐습니다. 때론 재소자를 돌보게 된 것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 교도소 안의 재소자 뿐 아니라 출소한 이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처음엔 장기수 18명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면담을 하고 필요한 물품을 넣어 주면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출소한 이들이 머지않아 다시 교도소에 들어오는 것을 봤습니다. 15년 전 기준으로 달랑 2만 8,000원을 받아들고 출소한 이들은 이미 가족들과 연도 끊긴 상태에서 돈이 떨어져 10일 안에 먹고살기 위해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재범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일하고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거란 생각에 15년 전 사랑의 집을 열었습니다.

한겨레 2007년 10월 29일 기사(홈페이지 캡쳐)
-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관계를 맺어 온 재소자들이 몇 명인가요?
20년 전 일을 시작한 이래 80여명을 돌봤고 지금까지 어머니와 아들로 관계를 이어가는 이들은 40여명쯤 됩니다. 이들 중 9명은 혼인도 주선해 줬습니다.
- 재소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 등 편견이 많은데요. 실제 이들을 만나가면서 느낀 점들은 어떤 게 있나요?
20년간 출소한 재소자들의 취업을 알선했는데 이들 중 취업에 실패한 경우는 단 3건뿐입니다. 출소한 이들도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일자리와 안정적 주거만 있으면 성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취업을 거부당하는 등 먹고 살길이 막막한데다 의심과 편견을 접하다보면 다시 범죄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 출소자들을 취직시켜 주겠다는 분들도 많은가요?
적지 않은 분들이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의 출소자들은 막노동판을 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출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임용 전 예비교사들이 활동하는 등 관심은 높습니다. 이 관심이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사회의식의 개선과 함께 보다 효율적인 교화정책이 필요합니다.
- 재소자들을 만나면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누나요?
재소자 중에는 자신을 버린 가족과 사회에 대한 원망을 품고 적개심을 키워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만나면 "징역을 몸으로 살아야지 왜 마음으로 사느냐. 죄 갚음을 하기 위해 몸은 고되게 하되 마음은 다시 흐트러지지 않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면에서 재소자들이 반성을 하기 위해서는 낮에는 고된 노역을 시키더라도 밤에는 샤워도 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합니다. 좁은 방에서 10여명이 칼잠을 자는데 어떻게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3~4범 이상의 범죄자가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서는 5~7년은 걸려”
- 교정제도에 재범방지책이 있지만 출소 뒤에도 지속적으로 예방하기는 힘든데요.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재범방지책은 어떤 게 있을까요?
범죄를 막기 위한 사회적 대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출소자들은 갱생보호공단에서 최대 1년 2개월까지 머물 수 있지만 규칙이 매우 엄격해 대부분 출소자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뛰쳐나옵니다. 3~4범 이상의 범죄자가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서는 5~7년은 족히 걸립니다. 이 기간 동안 이들을 감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또 출소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함께 편견없이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출소 뒤 결혼을 하고 택시운전을 하던 한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검찰에서 1,500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과중한 벌금에 이르지 않을 사고였는데 법을 넘는 편견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이 아들은 가정을 겉돌며 벌금을 내기 위해 또다시 범죄를 생각했었습니다.
- 재범을 막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중요할 텐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교도소와 사회에 각각 공장을 둔 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교도소 내 공장에서 일을 하며 기술을 쌓고 출소해서는 사회에 있는 공장으로 취직할 수 있다면 100명 중 98명은 재범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재범을 막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며, 행정과 기업이 함께 나선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 최근에는 사회복귀지원협의회를 만들고 전주교도소 내 재소자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지요?
지난 8월에 뜻 맞는 인사들과 함께 사회복귀지원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전주교도소 내에 영치금 단 한 푼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240여명에 달합니다. 교도소 내 빈부격차를 겪는 이들은 교화가 아닌 사회에 대한 앙심만 키워 나옵니다. 사회복귀지원협의회는 이들에게 한 달에 만원씩 영치금을 지원하고 출소 뒤 이들의 교화를 돕는 단체입니다. 현재 이사진 12명에 회원 130여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만 전국 47개 교도소에 각각 한 곳씩 민간지원협의회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삼례사건 진실 왜곡, 재심 과정의 비윤리 변호 행위, 속상하고 마음 아파”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도 유 씨는 변함없는 재소자들의 어머니, 엄마 역할을 하고 있다. 유 씨와 함께 교화위원으로 봉사활동을 펼쳐 왔던 박 씨는 모처럼 함께 만나 각자의 사연들을 나누며 과거를 회상한다.
"누구보다 삼례나라슈퍼 사건의 진실을 밝히며 백방으로 노력했던 박 씨를 잘 안다"는 유 씨는 "사건 초기부터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세 청년들의 재심에 이르기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펼쳤다"며 "그러나 재심 과정에서 발생한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변호 문제를 대하면 가슴 아프고 속상하다"고 말했다.
유 씨는 삼례사건 전반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박 씨가 무고한 세 청년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며 재심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에 만기 출소한 세 명의 청년들 중 오갈 데 없는 강인구 씨를 보살피며 자신의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사람이 바로 유 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오랫동안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박 씨는 유 씨에 대해 ‘여장부’라고 늘 표현한다.

유 씨와 박 씨는 정심회의 오랜 회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박 씨는 “유 씨가 교도소 봉사활동을 갈 무렵이면 떡과 과일 등을 50명분 이상 준비하여 직접 찾아가서 재소자들뿐만 아니라 고생하는 교도소 직원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주며 위로하고 재소자들에게 영치금을 매번 넣어주고 돌아왔다”며 “굳이 돈으로 다 환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씨는 “지금도 수십 명의 무기수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영치금을 넣어주며 전화까지 해서 그들을 위로하고 마음의 평온을 위해 노력하는 천사”라고 유 씨를 칭찬했다.

재소자들의 '엄마'에 감사하다는 유 씨.
그러자 유 씨는 “박젬마 씨야말로 재소자들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며 "특히 삼례사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던 세 청년에게 무죄임을 알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박준영 변호사가 나타나 마치 자신의 노력만으로 재심이 성공한 듯이 언론에 비쳐져서 몹씨 화나고 속이 상했다”고 말한다.
유 씨는 “재심 과정에서 변호사의 비윤리적인 행위와 잘못 알려진 진실은 지금도 속상하고 힘들다”며 반드시 진실이 규명되기 바란다“고 덧붙여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유 씨는 “많은 자녀들을 위해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라며 “명절이나 행사 때면 손자와 손녀들을 데리고 오는 자녀들을 위해서도 건강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 자녀들 중에는 사업가에서부터 점쟁이까지 다양하다”며 “가난해서 못 배우고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늘 감사하다”고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전북의소리>
cms.jb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1
재소자들 '엄마', "삼례나라슈퍼사건 왜곡 가슴 아파” - 전북의소리
“엄마. 다른 사람들은 영치금을 보내지 않는데 엄마는 이렇게 오랫동안 영치금을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엄마. 꼭 모범수로 나가서 뵙겠습니다.”마치 친 엄마처럼 감옥에 있는 무기수
www.jb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