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전북의소리]잘 나가던 대기업 카피라이터, '자비 나르는 수레꾼'으로

jbsori 2021. 3. 12. 20:16

[특별 인터뷰] 오시환 씨와 멘 완니 씨

오시환 씨 부부와 멘 완니 씨(가운데). \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

 

봉사 단체치고 이름이 매우 특이하다. ‘자비’를 나누는 봉사 단체라는 뉘앙스가 여러 행간에서 묻어난다.

이 단체를 만들고 이끌어 온 오시환(67) 해외봉사팀장의 삶도 특이하다. 대기업의 홍보맨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우연히 불교 봉사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것이 어느새 국제적인 봉사활동가로 변했다.

특히 캄보디아는 그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후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국내 대학 및 대학원에 유학을 주선하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그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펼치는 친근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서울에서 자라고 직장을 다니며 살다가 현재는 경북 봉화군에 귀농해 살고 있는 오 팀장이 11일 전주에 방문했다.

 

캄보디아 학생들 지원해주며 봉사활동 매년 함께 펼치는 오시환 씨의 특별한 삶

 

전주 방문은 한옥마을에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란다. 그가 전주를 방문하게 된 배경은 1970년대 부안에 봉사하러 영혼의 고향이 된 고 브라이언 배리(Brain A Barry, 1945~2016)와의 인연 때문이다.

브라이언 배리 씨와 김초례 여사의 생전 모습.

 

고 브라이언 배리 씨와 관련된 기사는 지난해 <전북의소리>에서 두 차례 보도된 바 있다.

한국 땅에 평화봉사단 교육위원 부단장(K22)으로 미국에서 온 고 배리 씨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안의 한 할머니(김초례 씨)를 통해 접한 불교에 점점 심취하면서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평화봉사단 임기를 마치고 당시 해외수출을 시작한 대우의 해외 광고부 홍보 파트에서 1979년부터 1998년까지 근무하며 대원정사 불교대학에서 불경을 공부한 그가 탱화와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1986년 한 미국 건축가의 통역을 맡아 서울 신촌 봉원사에 갔을 때인데 이 시기에 오 팀장과도 만나게 됐다.

 

[관련 기사]

봉사하러 부안에 왔다가 영혼의 고향 찾은 배리씨

"그냥 확 땡겨서 극락에 눌러 앉았지요"

 

오 팀장이 장학금을 계속 지원해 온 전북대 대학원생과 미리 만나 약 2시 간 가량 특별한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오 팀장이 6년여 동안 장학금을 지원하며 보살펴 온 캄보디아 유학생은 멘 완니(Men Vanny, 25) 씨. 그는 캄보디아 왕립 프놈펜대학의 한국어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전북대 대학원 행정학과 석사과정 4학기에 재학 중이다.

오 팀장 부부와 함께 만나 그들의 특별한 만남과 인연, 국제 봉사활동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다음은 11일 오후 전주시 송천동 미디어카페에서 이들과 만나 나눈 인터뷰를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2009년부터 캄보디아 현지에 초·중학교 설립, 교육과 봉사활동 병행"

오시환 씨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이라는 명칭이 특이하다. 누가 왜 이런 명칭을 지었으며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

"말 그대로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보다 가난한 불교 국가에서 배움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봉사단체다.

2009년부터 캄보디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 독재 국가에서 자유와 교육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교육기관(초등학교 수준)을 현지에 설립하고 물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 우물을 파주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이후 중학교 시설도 지어서 현지에서 600~7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매년 입학해 현지 교사를 채용하여 직접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려운 이웃들에게 봉사활동도 정기적으로 펼치고 있다.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이라는 호칭은 2010년 회원들이 지은 이름 중 하나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언제, 어디에 설립했고 학생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초등학교는 2009년에, 중학교는 2012년에 캄보디아 북쪽 산맥(Dong Rek)지역에 설립했다.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한 학년에 600명 정도이며, 중학교는 300명 정도로 매년 입학하고 있다. 교육은 현지에서 정규 교사들을 모집해 정규 교육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캄보디아 대학생 한때 30명까지 확대했다가 지금은 15명 후원"

캄보디아 현지 학생들

 

대학생들에게도 후원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누구에게 얼마나 지원하고 있는가?

"캄보디아 대학생들 가운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다. 시골 출신에 중점을 두고 프놈펜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들의 등록금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명에서 시작해서 한때는 30명까지 확대했다가 작년부터 15명으로 줄여서 후원하고 있다. 한번 장학생으로 선정되면 별일 없으면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교처럼 등록금이 비싸면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지만 캄보디아는 아직 한국처럼 등록금이 비싸지 않아서 한해 등록금이 500불에서 600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을 '수레꾼 장학생'이라고 부른다. 여기 옆에 있는 멘 완니도 현지 대학에서 수레꾼 장학금을 받고 졸업한 뒤 한국의 전북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유학생에게는 학비에서부터 모든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가난한 학생들 졸업해서 자리 잡고 연락하면 가장 기뻐"

 

수레꾼 장학금을 받고 졸업한 학생들과 연락을 자주 하는지?

"자주 연락하고 봉사활동도 함께 한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옴 보레이(Oum Borey)에게서 최근 페이스북으로 인사 메시지가 왔다. 잘 있느냐며 서로 인사를 매일 나누기도 한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결혼식에 쓰이는 크라마 등의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품들을 만들어서 중국으로 수출도 하고 있다고 전홰왔다.

여기 있는 멘 완니도 현지 대학에서 학생 때 프놈펜 국립 박물관 앞에서 모자를 팔고 있는 옴 보레이를 보고서 눈물을 글썽였던 때가 생각난다. 프놈펜에 집이 없어서 스님 방에 얹혀 살았던 '옴 보레이'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국립 박물관 앞에서 모자를 팔고, 밤에는 별도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력으로 대학을 마쳤다. 졸업하고 예쁜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까지 낳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장도 있는데 이런 소식을 직접 알려올 때마다 참으로 기쁘다."

장학금을 혼자 벌어서 지원하는가?

"그렇지 않다. 단체에서 봉사활동 등을 하면서 모은 기금 외에도 정기적으로 모금활동을 하여 기금을 적립하여 지급한다."

 

"캄보디아에 마스크 2차례 지원...지금도 현지에는 많이 부족해"

캄보디아에 보낼 마스크를 오시환 씨가 포장하고 있는 모습.

 

최근에는 마스크를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마스크를 지원했다. 캄보디아 현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마스크를 보내면 학생들과 가족들에게 지급된다. 

이번 달에는 프놈펜에 있는 현지 수레꾼 장학생들이 봉사하는데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나누어주라고 1만장을, 그리고 싸무롱에 있는 수레꾼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1만장, 모두 합해서 2만장을 보냈다.

캄보디아 현지에서 마스크를 받고 즐거워 하는 학생들.

캄보디아로 떠나는 배편으로 마스크를 보내면 약 20일 후에는 현지에 도착한다.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도움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니 참으로 즐겁고 기쁘다.

지금 캄보디아도 우리나라처럼 코로나19의 확진자가 계속 나온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부디 올해는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캄보디아 현지 학교로 배송될 마스크. 

 

최근 미얀마에서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어떻게 생각하나?

"미얀마에서 연일 사망자 소식이 들려온다. 군부가 쏜 총에 맞고 사망한 치알신이란 19세의 소녀의 시신이 도굴됐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미얀마는 붓다의 나라다. 그런데 붓다의 나라에서 왜 이런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참으로 아쉽다.

미얀마의 독립 역사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근대 흑역사가 얽히고 설켜있다.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전쟁을 하던 독립군들이 군부로 권력을 장악하고 53년 동안 미얀마를 지배해 왔다.

그들은 국제사회와 국민들의 지탄을 받다가 5년 전 아웅산 수지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다시 구테타를 일으키고 국민들에게 저리도 무자비하게 총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연마 사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분출"

미얀마 사태에 대해 말하는 오시환 씨.

 

붓다는 인간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세 가지 독이 있다고 하고 이것을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세 가지 독이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분출이다. 이 세 가지를 컨트롤 못하는 까닭은 한마디로 무명(無明)때문이라 한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식별할 수 없는 것처럼, 무명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눈치챌 수 없다.

그들은 지금 무명의 극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얀마 국민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한탄한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독재 권력에 희생당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전북 부안과는 인연이 많다고 들었다. 특히 고인이 된 브라이언 배리 씨와는 어떤 인연인가?

브라이언 배리 씨의 생전 모습.

 

"지워질 수 없는 배리(Barry) 형님과의 기록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하고 반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는 1945년생이다. 나와는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는 그는 시카고 대학 정치과에 재학 중에 전북 부안으로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봉사를 왔고, 졸업 후에는 학생들을 인솔하여 한국으로 봉사를 왔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과 선(禪) 매력에 빠져 한국에 눌러 앉아버렸다.

 

"80년대 대기업 홍보실에서 만난 부안의 배리 형, 지금도 못 잊어"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80년 봄이었다. 대기업 홍보실 카피라이터로 입사를 한 나는 영문 카피라이터였던 그와 매우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는 만남은 흔히 직장에서 서로 일하는 사람의 관계로 만난 그저 그런 만남에 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냥 그뿐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에게서 뿜어나오는 지칠 줄 모르는 유머와 맑은 정신세계, 그리고 수행의 깊이에 나는 점점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그가 생명줄을 놓는 순간까지 그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하나도 헛되지 않았다. 만나면 좋았고, 헤어지면 섭섭했다. 그는 말을 하면 웃겼고, 그가 행동하면 나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배리 형님에게 받은 이와 같은 영향으로 본 직업 이외에 불교계의 음악단체인 ‘니르바나 오케스트라’를 5년간 후원 및 기획하는 일을 했으며, 복지원에서 밥을 하는 봉사도 10여 년을 꾸준히 했었다.

지금은 형님이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캄보디아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짓고, 대학생 등록금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올해는 그곳에 기술·공예 고등학교 설립을 준비 하고 있다.

나는 이렇듯 브라이언 형님을 그저 마음속에만 담고 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전주에서 브라이언 배리 형님을 기억하고, 형님의 일생을 재조명하는 작은 불씨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너무 너무 기뻤다.

 전주에서 '베리 바람꽃'이란 타이틀로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는 소식이 날아왔고 공연의 일부를 폰으로 찍은 영상 몇 토막을 보내왔다. 너무 기뻤고 그 일로 이렇게 전주를 찾게 됐다. 그저 그렇게 떠나간 형님의 귀한 일생을 안타까워하고만 있던 나에게 또 다른 불씨가 보이는 듯해서 말할 수 없이 기쁘다."


다음은 멘 완니 씨와 나눈 인터뷰(일문일답)다.

 

"프놈펜대학 한국어과 졸업 후 전북대 대학원 행정학과 유학"

      전북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멘 완니 씨.

 

한국에는 언제 왔는가?

"2년 전 프놈펜대학 4년 과정(한국어 전공)을 졸업하고 한국에 왔다. 전북대 대학원 항정학과에 다니기 위해서다."

왜 행정학과를 선택했나?

"캄보디아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며 한국의 공무원 조직과 사회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공직 사회와 행정이 배우고 싶어 대학원을 진학하게 됐다."

수레꾼 장학금은 언제부터 받게 됐나?

"4년 전 대학에 다니면서 줄곧 받았다. 지금도 많은 지원과 후원을 받으며 개인적으로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한국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

언제 졸업하게 되는가?

"올해 석사 논문 과정이 남았다. 가장 어려운 고비라고 들었다. 논문이 완성되고 통과되면 한국에서 박사 과정에 지원해 볼 생각이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고국에 가서 모교(프놈펜대학)의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수를 하고 싶다."

 

"수레꾼 장학금 많은 도움...특별히 어려운 일 없어"

 

오 팀장과는 언제부터 알게 됐는가?

"고국에서 대학 2학년 때 쯤 장학금을 받고 봉사활동을 같이 하면서 알게 됐다.

"

브라이언 배리 씨에 대해서 잘 아는가?

"잘 모른다."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다. 다만, 한국 문화에 대해 아직 서툴다보니 간혹 단체 활동에서 실수할 때가 있다."

고국에는 가족들이 기다고 있을 텐데,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며 누가 가장 보고 싶은가?

"부모님과 결혼한 형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있다. 동생이 가장 보고 싶다."

 

"미얀마 청년들, 희생 값진 결과 만들어 냈으면"

미얀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타깝다. 항상 불안하게 생각했는데 결국 터지고 말았다. 젊은 학생들의 희생이 값진 결과를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른 인접 국가들, 특히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오 대표와 수레꾼 장학금을 주는 단체에 하고 싶은 말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분들을 위해서도 꼭 정규 학위 과정을 기한 내 잘 마칠 것이다. 그리고 박사 학위까지 받아서 보답하겠다. 그분들과 평생 함께 봉사활동을 펼치며 살아갈 것이다.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드린다."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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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대기업 카피라이터, '자비 나르는 수레꾼'으로 - 전북의소리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봉사 단체치고 이름이 매우 특이하다. ‘자비’를 나누는 봉사 단체라는 뉘앙스가 여러 행간에서 묻어난다.이 단체를 만들고 이끌어 온 오시환(67) 대표의 삶도 특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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