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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장편소설] 각시붕어-청천 날벼락(1)

jbsori 2021. 2. 1. 06:57

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덕촌부락 사람들에게 어려울 때에는 양식을 나눠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고, 신사임당처럼 현숙한 분이라고 존경 받아온 정정숙이 세상을 떠난지 1년이 지나갔다.

새봄이 왔지만, 해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소작료, 빚과 이자, 세금 등을 지급하고 난 후에 남은 식량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초여름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버텨야했다. 힘들고도 힘들다는 나날이 계속되는 보릿고개가 닥쳤다.

올해는 춘궁기인 보릿고개에, 10여년 만에나 올 수 있는 극한 가뭄이 들었다. 논에 파종했던 모들과 콩, 팥, 수수, 감자, 옥수수 등 모든 밭작물이 타들어 갔다. 심지어는 논두렁, 들과 산에서 자라던 나물 까지도 말라버렸다. 논바닥은 거북등처럼 갈라졌다. 밭은 고비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흙먼지를 일으켰다.

 

일제 강점기 농부들, 혹독한 수탈 때문에... 

 

상머슴 김복동 말에 의하면 “보릿고개처럼 어려운 시기는, 고대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부터 있어왔다. 가뭄이나 홍수, 메뚜기나 벼멸구 등 해충, 벼의 각종 병균 등으로 인해 벌어졌다. 참담한 굶주림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거의 해마다 보릿고개가 일어났다. 연례행사로 겪게 된 것은 “1910년도에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이란 명목 하에, 강제로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한 이후부터이다.” 했다. 일제는 우리나라 농촌을 식량기지화하기 위해, 1920년대에 산미증산계획이라는 미명아래 수리조합을 만들었다. 조합비를 과중하게 걷어, 토지를 방매하도록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농민들이 판 토지를, 일본인들과 하수인들이 싼값에 구입했다. 농부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고, 과중한 토지세를 물려 많은 빚을 지게 만들었다. 농부들은 빚의 대부분을 생산비로 쓰지 못했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량구입비로 쓸 수밖에 없었다. 농촌의 궁핍함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극심한 수탈과 빚에 시달리고 있는 농부들을 돕고 싶어, 일본유학 등으로 신식 문물 등을 공부한 조성면장 김만복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야학을 열어 작물, 비료, 병충해 방지 등 수확을 증가시키는 농사법을 가르쳤다. 빚을 갚는 방법 등을 교육시켰다. 농촌 부흥운동을 벌였으나, 진척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의 농부들은 혹독한 일제의 수탈을 견디어내야 했다. 소작농으로 안주하거나, 걸인의 무리를 이루어 유랑했다.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났다.

일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남만주철도회사를 합작시켰다. 동아권업공사와 선만척식주식회사를 설치하였다. 만주이민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농민을 만주의 소작농으로 쫓아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농민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다. 보릿고개라는 극한 상황을 만들어 가며, 해마다 지속적으로 발생 했다.

농민들은 이러한 보릿고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논이 없는 집의 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바구니를 들고 추수가 끝난 논으로 갔다. 일 열로 늘어서서 논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모아 집으로 가져왔다. 어머니는 이삭을 절구통에 넣고 빻은 후, 키질을 해 현미쌀을 찾아 모았다. 아이들은 현미쌀을 한줌씩 얻어먹고 “맛이있다.”고 더 달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밥 대신 희멀건 죽 끓여 먹어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아이들은 바구니를 들고, 어머니와 수확이 끝난 고구마 밭으로 갔다. 한 고랑 한 고랑 씩 뒤져, 흘리고 간 고구마를 찾아내 바구니에 담았다. 어머니는 밭 한쪽구석에 쌓여 있는, 잘라서 쌓아놓은 고구마 덩굴 쪽으로 갔다. 고구마줄기를 뒤져, 싱싱한 잎과 줄기를 찾아냈다. 하나하나 꺾어서 바구니에 차곡차곡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꺾어온 줄기를 차례로 짚으로 엮어 처마에 걸어두었다.

주워가지고 온 고구마는, 물에 잘 씻어 솥에 넣고 쪘다. 배가고픈 아이들은 고구마 익어가는 냄새가 피어오르면, 기다렸다는 듯 부엌으로 모여 들었다. 어머니는 고구마를 젓가락으로 찔러보고 잘 들어가면 “익었다는 신호가 왔다”며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뜨거운 고구마를 호호 불면서 맛있게 먹었다. 모두들 웃음꽃이 피어났다.

겨울이 되면, 고구마줄기가 바싹 말라서 딱딱해 졌다. 하루정도 물에 담구어 두어 부드럽게 불린 후, 보리를 한줌 넣고 죽을 써 먹었다. 멀건 풀죽이었지만, 아이들은 산해진미를 만난 것처럼, 서로 많이 먹으려고 더 달라했다. 추수 뒤에도 적은 식량으로 여러 끼를 때우려, 밥을 대신 희멀건 죽으로 끓여먹었다.

쌀밥대신 잡곡밥으로, 잡곡밥은 만주에서 들여온 값싼 좁쌀밥으로 생명을 연명해 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들은, 만주의 좁쌀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싸라기를 산채나 나물의 묽은 죽에 띄워 먹었다. 밀기울, 등을 반죽 해가지고 쪄먹기도 했다.

어쩌다 보리 같은 잡곡을 품삯으로 받아와도 조, 무 등을 넣어먹었다. 보리 등 곡식에 물을 많이 부어 미음처럼 멀건 죽을 쒀 먹었다. 쌀은 조금씩 섞어 먹었다. 이렇게 해도, 곡식이 부족한 농민들은 배가 고팠다. 소나무껍질, 칡뿌리, 솔잎 등은 물론, 산야의 나물을 뜯어 죽을 끓여먹었다. 전단토나 흰 찰흙을 끓여 먹었다.

보릿고개가 오면 먹을래야 먹을 것이 없었고, 입을래야 입을 옷이 없었다.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산이나 길가에 쓰러져, 인생의 종말을 고하는 자가 많았다” 한다.

 

"굶는 농부들이 부지기수이니, 곳간에 있는 곡식을 나눠 줘야겠다" 

 

덕촌부락 농민들도, 보릿고개에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다. 남자 어른들은 낮과 바구니를 들고, 봉두산을 비롯한 멀리 있는 산까지 찾아갔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왔다. 아이들은 논둑에서 고들빼기, 냉이, 원추리, 쑥, 민들레, 질경이, 제비꽃 등의 나물을 캤다.

아낙들은 산속에 들어가 곰취, 참취 등 취나물 같은 산나물을 캤다. 두릅과 엄나무 순을 따오기도 했다. 농수로에서 우렁이, 미꾸라지, 새우 등을 잡아왔다.

덕촌부락민들은 보릿고개를 견디어 보려고, 나물죽과 풀뿌리 등 온갖 것을 먹었다. 고통의 나날을 보냈지만 한발까지 겹쳐,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더해 갔다. 보다 못한 송화자가 김병만에게 “올해는 유난히도 보릿고개가 길고, 한발까지 겹쳤다. 굶는 농부들이 부지기수이니, 곳간에 있는 곡식을 나눠 주어야겠다”고 했다.

시어머니 정정숙은 살아 있을 때, 보릿고개, 돌림병, 흉년 등으로 농부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배고픔을 달래주었다. 쌀, 보리 등 곡식을 부락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농사를 짓다가 다친 사람, 병들어 일을 할 수없는 사람, 동냥을 하러 온 거지 등 힘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꼭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부락민들은 시어머니 정정숙을 “신사임당 할머니”라고 부르며, 존경해왔던 기억이 새롭다고 말했다.

며칠 후 김병만은 곳간 문을 열고 상머슴 김복동을 시켜, 부락민들에게 쌀 1말과 보리 1말씩을 나눠 주라고 했다. 곡식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어머니 정정숙의 측은지심을 아들 김병만이 이어 받아, 좋은 일을 하니 복 받을 것이다”고 축원을 했다.

부락민들은 김병만이 내어준 곡식을 한 가마씩으로 생각했다. 곡식 한줌에 나물을 3배쯤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나물죽을 쑤었다. 배 고프다는 아이들을 달래 주었다. 그 당시는 산아제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의술이 발달하지도 않아, 애들이 태어난 대로 길러야 했다. 1가구당 애들이 10명 정도 있어, 수시로 굶으며 살아야 했다.

한발과 겹친 보릿고개가 길어졌다. 먹을 것이 떨어진 부락민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했다. 산과 들의 개구리를 잡아와 껍질을 벗긴 후 죽을 쑤어 먹거나 구워 먹었다. 어떤 아이들은 배가고파 봉두산으로 달려갔다. 나무위로 올라가 황새의 둥우리를 차례차례 뒤졌다. 금지되어 있는 황새 알을 훔쳐와 냄비에 물을 붓고 끓여 먹었다.

힘이 센 장정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저수지나 하천으로 달려갔다. 커다랗고 긴 구렁이를 찾아내 산으로 가져가, 껍질을 벗기고 불에 구워먹으며, 기력을 보충했다. 가뭄이 길어져 마을 앞에 있는 커다란 저수지가 말라버렸다. 바닥을 드러냈다. 마을 이장이 “집집마다 양동이를 가지고 저수지 앞에 모이라”고 했다. 모두 모이자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가라”고 하자 모두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저수지 바닥에는 잉어, 붕어, 메기, 피라미, 가물치, 쏘가리, 빠가사리, 모래무지 등 수많은 물고기들이 퍼덕이고 있었다. 이들을 한순간에 양껏 잡아서 집에 돌아왔다. 쌀 한줌과 나물을 넣고, 물을 많이 부어 어죽을 쑤었다. 배고픈 애들에게 주었다.

이렇게 덕촌부락민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배고픔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이 광경을 보고 송화자는 “보릿고개”라는 시를 지어 애달픈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보릿고개

녹색 

바람결에 춤추는 보리 

언제 황금 옷 갈아입을까 

논밭의 배고픈 뜸부기 

뱃속 깊은 곳에서 토해낸 

서러운 눈물 흘리고 

몇 날을 굶은 자식들 

수로 배 채우고 

밤새워 속울음 우는 구나 

 

달이 떠오르는 깊은 밤에 보리를 베어다 구워먹는 '서리' 

 

모두를 배고프게 했던 보릿고개도, 계절의 시계에 밀려서 지나갔다.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뜨거운 바람이, 종달새들의 노래 소리에 맞춰 불어오기 시작했다. 초록색 옷을 입고 바람결에 따라 춤을 추며 일 년 내내 독야청청할 것같이 으스대던 보리들도, 하나 둘씩 머리칼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며 할아버지처럼 익어갔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물론이고 배가고파서 배가 등짝에 달라 붙어버린 집을 지키는 개들 까지, 모두가 집나간 딸을 기다리듯이 기다리던 보리 수확기가 다가왔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용칠이, 덕만이, 창수, 재경이 등 몇몇 동무들은 해마다 했던 대로, 달이 떠오르는 깊은 밤에 보리를 베어다 구워먹는 “서리”를 하기로 했다.

그들은 낮에 약속한 대로 노랗게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보리밭에서, 아직 덜 익은 푸른 보리만 골라서 베어 내었다. 마을 옆에 흐르는 개울가로 숨어, 구워먹었다.

보리는 춘궁기가 되어 많은 농민들이 배고픔에 시달릴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뜨거운 태양을 받고 비바람과 모진 시련을 겪고 자라,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선사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보리는, 기원전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한다. 

/글·그림=이용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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